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에게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방탕하고 여자를 좋아했던 왕으로 알려져있는데 그 말이 사실일까? 근데 의자왕은 해동증자라고 불렸을 정도로 효심이 깊고 학문이 뛰어난 왕 중 한 명이었다. 근데 왜 여자를 밝히는 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있던 것일까?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후부터 직접 나라를 돌보며 생업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억울하게 수감 된 죄수들을 사면하는 등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왕이다. 또, 그해 가을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을 비롯해 40여성을 빼앗으며 신라와의 세력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왕이다.



또, 백제를 막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1만 명의 군사를 출정시켜 빼앗기도 하였다. 의자왕은 우리가 알고 있던 왕의 모습과 달리,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영토 확장에 힘 썼고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주요 직책에 자신의 아들(왕자) 41명을 임명하면서부터 백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직책에 왕자들을 임명하면서 귀족들의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함인데 그 당시 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다.




또, 연이은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의자왕은 거만해졌고 백제말기 충신이었던 성충과 흥수가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왕에게 말했다가 투옥과 귀양에 처했다. 성충은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글을 올린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성충이 말한대로 백제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연합이 백제를 공격했다. 의자왕은 다급히 계백에게 5천 명의 정예부대를 주고 황산벌에서 막으라고 지시했으나, 수적으로 밀리며 결국 패배하고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황산벌에서 승리한 나당연합은 기세를 몰아, 사비성을 공격한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이동하는데 이 때 함께 했던 예식진이 배신하면서 백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식진은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넘어가 '좌위위대장군'에 올랐다. 당에 들어간 지 12년 만에 58세로 사망하여 당 조정의 배려로 같은 해 11월 21일에 시안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고관대작들이 묻히던 고양원에 묻혔다고 한다.




백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이 가장 컸다고 한다. 의자왕이 방탕한 생활 떄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승전국인 신라가 삼국통일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의자왕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패망국이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승전국의 시점에서 역사가 기록된 것임이 분명하다.




삼천궁녀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1. 백제의 규모로 봤을 때 3천 명의 궁녀는 무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 왕궁의 터를 살펴보면 삼천 명의 궁녀가 살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2. 사비성 인구는 5만 명에 불과

백제가 멸망할 당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 불과했다. 이 중 여성의 숫자가 2만 5천 명이었는데 연소자와 노약자를 빼면 1만 5천 명이었다. 정말로 삼천궁녀가 사실이라면 사비성 성인 여성의 20%가 궁녀라는 사실.... (7세기 백제보다 국력이 강했던 조선도 궁녀가 5~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3. 백제의 멸망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책 뿐

백제의 멸망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승전국 '신라'의 관점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책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는 삼국통일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백제를 과장하고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역사 왜곡된 부분은 수없이 많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100%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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