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면서 고려의 우왕과 최영 장군은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이후 우왕은 정치적 빌미로 전국 4만 여명의 군사를 모집해 최영, 조민수, 이성계를 필두로 요동정벌군을 구성해 5월 24일 평양을 출발으로 6월 11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성계를 비롯한 많은 대신들이 4대 불가론을 들며 원했던 전쟁이 아니었죠. 우왕과 최영 장군의 고집스러운 주장으로 어쩔 수 없이 이성계는 출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예언했던 것처럼 큰 장마를 만나 더 이상 앞으로 진군할 수 없었고 갈수록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었습니다.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던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왕은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성계는 굴하지 않고 한번 더 서신을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성계가 주장했던 4대 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으로 침략할 것이다.

넷째,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의 명을 거역하고 고려로 회군을 결심하게 됩니다. 왕명을 거역한 우왕과 최영은 급히 군사를 모집해 처단하려고 했지만 그 당시 고려 상황이 좋지 않았던 터라, 모집된 병사도 극히 일부였죠.


최영과 이성계의 대립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최영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맞붙게 되지만, 병사가 극히 일부였던 최영 장군은 결국 잡혀 귀양가게 됩니다. 그 이후 처형 당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 당하면서 이성계를 옹호하던 신진사대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이후 위화도회군을 도왔던 조민수와도 대립을 하게 되지만 신진사대부에 의해 축출되어 버리죠.


찬성론자들의 입장


우선 찬성론자들의 입장은 명나라의 군대는 15만 대군이었고, 고려의 군대는 4만 명으로 이뤄졌습니다. 요동을 정벌했어도 병력 차이가 극심했기 대문에 금방 빼았을 것이고 명나라가 더 많은 조공을 요구하고 침략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왜구의 침략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그 당시 왜구의 침략으로 남해는 혼돈의 시기였다고 합니다. 1389년 박위가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까지 왜구 침략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에 만약, 명나라와 전쟁을 펼친다면 왜구에 의해 침략 당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반대론자 입장


왕명을 거역한 이성계는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고려에 충성하기로 했다면 왕명에 따라 요동정벌을 감행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사 개개인의 실력이나 무기 수준은 명나라에 뒤쳐질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 건국하고 내부정비가 끝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법과 전쟁에 능한 이성계였다면 요동정벌에 성공했을 가능성도 높고 더 이상 명나라에게 조공을 할 필요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주장은 629년이 흐른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요동정벌에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입장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지금처럼 중국의 갑질 논란에 휩싸이지 않았겠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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