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왕을 보필하는 내시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 내시들은 우리가 배웠을 때 거세를 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 알려져있는데요. 그 말이 정말 사실일까요? 오늘은 내시들이 정말 거세를 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시에 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원년 환수'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당시 내시는 거세를 하지 않은 엘리트 문관이었죠. 


고려시대는 왕을 모시던 내관(내시)와 궁궐에서 잡무를 보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 당시 환관은 거세를 해야했기 때문에 주로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환관이 되면 그래도 밥은 먹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했죠.





그러다 고려 중기에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도 원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 원나라의 환관제도가 도입되면서 고려도 환관이 내관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답니다. 근데 궁궐에서 일처리를 해야하는 직업인데 굳이 거세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내시는 궁궐 내에 위치하여 왕의 허드렛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궁녀를 비롯해 후궁들과의 만남이 잦았는데요. 만남이 지속되면 사랑도 싹 트이는 법이라고 하죠? 혹시나 그녀들을 탐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거세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당시, 궁궐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왕의 여자였기 때문이죠. 실제로 왕의 여자를 탐한 내시들도 역사가 기록된 서적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시는 고려시대와 달리, 왕을 보필하면서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관직입니다. 상선정도의 내시가 되면 정승판서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파워가 강력했다고 하는데요. 그 힘이 강력해지고 자식까지 낳으면 세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거세 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십상시의 난'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의 10명 환관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윤을 챙기고 대장군 하진을 암살한 사건이죠. 비록 죽었지만 역사에 기록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가족이 생기면 왕을 보필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거세시켰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거세방법


그 당시 거세는 화학적 거세가 아닌, 물리적인 방법으로 거세했습니다. 의학이 발달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경과 고환을 모두 자르는 형태로 시술되었는데 부작용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절반 이상이 죽었을 정도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하네요. 이후 의학이 발달하면서 명주실을 이용해 고환에 묶었고 썩게 만들어 거세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흥미로운 사실들


내시들도 결혼생활을 즐겼다. 내시들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결혼생활을 했고, 거세를 했기 때문에 3세 이하의 고자 아이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고 한다.


성관계가 가능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고환만 제거하는 시술형태로 바뀌면서 성관계가 가능했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을 분비하는 고환이 제거되면서 발기가 이뤄지지 않아 정상적인 관계가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도구를 이용해 관계를 가졌다는 설도 나올 정도..


출퇴근이 가능했다. 내시도 일반 관료들처럼 궁궐 밖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처음엔 궁궐 안에서 생활하는 장번으로 생활하다가 일정기간 근무하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내시들이 거세했던 이유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정말 흥미롭죠? 역사는 보면 볼수록 재밌는 것 같습니다. 무섭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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