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급부상한다. 2대 황제였던 수양제는 주변 나라에게 권세를 휘두르고 조공과 입조를 요구하였다. 고구려를 제외한 국가들은 조공과 입조를 받아들였지만, 제 2의 전성기를 꿈꾸던 고구려 영양왕은 거부하고 오히려 1만 군사를 일으켜 요서지역의 임유관을 선제공격하며 반발하였다.




수나라와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었는데 수양제가 돌궐과 접촉하는 고구려 사신을 우연히 보고, 모든 국력을 총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심한다. 612년 2월, 모든 출정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전투병 113만 3800명, 지원병까지 모두 합치면 200만이 넘는 대군을 가진 나라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200만 대군이 넘는 군대가 출발하는데만 40여일이 걸렸고 그 행렬은 천리에 달했다. 이 대군을 상대해야하는 고구려는 수나라의 1/4이었던 34만 5천 명이었다. 더군다나 수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 곳에 집중투자를 하지 못했고 여러 성으로 분산되었으니 때에 따라선 10:1로 상대해야하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성의 특징 


요동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성으로 절대 뺏겨서는 안될 주요 거점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고구려는 고구려 성의 특징과 기만전술로 요동성을 사수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성은 지대가 높고 험준한 곳에 위치해있어 섣불리 적들이 공격해오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인 치를 활용해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이 가능했다. 또, 치는 많은 병력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수나라는 요동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수양제는 10만 수군을 파견해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했지만, 이 수군마저 대패하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별동대 파견 :: 보급문제


그래서 수양제는 별동대 30만 명을 구성해 나머지 병력들이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는동안 우회해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우중문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문제는 보급대가 없어, 직접 100일치의 군량을 가지고 이동해야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병사들은 군량 때문에 이동이 불편했고 그로인해 땅에 파묻어서 군량을 소모한 병사들도 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의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고, 게릴라전을 통해 군량을 빼앗고 약탈하면서 우중문이 이끈 별동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또, 전면전이 발생하면 을지문덕은 일부러 지는 척을 하면서 별동대의 사기를 돋궜다. 그리고 거짓으로 항복을 한다는 서신을 보내고 직접 만난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한다. "지금 별동대를 평양성 외곽으로 물리면 고구려의 왕과 함께 수양제를 알현하고 항복의식을 치루겠소."라고 말하자, 우중문은 그 때 상황이 좋지 않은터라, 그 제안을 받아드린다.


#수나라의 방심


수나라 병사들은 이겼다는 생각에 자만에 빠져있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 을지문덕과 그를 따랐던 장수들은 30만 대군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크게 당황한 별동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서로 살기위해 발버둥 쳤다.



이렇게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을지문덕 장군이 퇴각로에 상류의 둑을 막아 가뒀다가 살수를 건너는 순간 둑을 터뜨려 수공으로 전멸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 대량의 물을 가둘 수 있었던 담수기법도 없었을 뿐더러, 단기간에 둑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단재 신채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기록된 내용이다. 살수대첩이 얼마나 큰 승리였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되게 쓴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100만 대군을 거느렸던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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